잘 있거라 첫 회사야
3년차 프론트엔드 개발자의 첫 회사 및 이직 회고
이직한 지 불과 2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 회사에 대한 기억이 어찌나 빠르게 사라지는지 놀라울 정도다. 기억을 몽땅 까먹기 전에 신입으로 입사해 이직을 결심하기까지 약 3년간의 시간에 대한 회고를 적어보려고 한다. 나중을 위해 이직 당시의 초심을 기록해 두는 일기 같은 글이 될 것 같다.
시간순으로 돌아보는 3년
입사
전 회사는 2020년 11월에 입사해 2023년 7월에 퇴사했다.
내가 취업을 준비하던 2020년은 IT 업계의 굉장한 호황기였다. 비대면 특수를 누리는 곳이 많았고, 투자도 활발했다. 이 훈풍을 타고 여러 기업에서 개발자를 대거 채용했던 것이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분사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의 전 회사 역시 공격적으로 인력을 충원 중이었으며, 이때 나도 신입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입사 초반의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1년 남짓의 독학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바닥나려던 찰나에 얻은, 반짝반짝한 IT 기업 합격 메일은 거의 장원급제 같은 성취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데 회사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던 기사들과 블라인드의 높은 별점들이 마치 내 취준의 성적표 같았다.
회사건, 학교건, 어떤 조직에 들어간다는 것은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닌 성과를 마치 나의 성과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조직의 일원이 된다고 해서, 그 조직의 역량이 내 것으로 호로록 흡수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땐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명함 받을 생각에 마냥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입사를 하게 되는데...
0~1년: 신입은 혼란스럽다
입사 직후에는 회사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딱히 회사의 문제는 아니었고, 신입의 흔한 착각이란 착각은 모조리 했던 내 탓이었다.
착각 1. 신입에게 교육이 제공될 것이다.
- 기대: 체계적인 신입 온보딩 시스템, 옆에 챡 붙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수. 그런 것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지금이야 그런 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회사에 교육기관의 역할을 기대하는 순진함이 남아있었다.
- 현실: 나는 회사가 서비스를 출시 하기도 전,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업 방향에 따라 여러 프로젝트들이 숱하게 생겼다 사라지던 시기에 입사했다. 신입 교육을 기대하기엔 나만큼이나 내 옆의 동료도 혼란스러워하던 때였다. 그래도 처음에 그런 혼란을 몇 개월 겪은 덕분에 위키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찾든 정보가 없으면 내가 만들든... 알아서 필요한 걸 주워 먹으며 생존하는 법을 터득했다.
착각 2. 도메인 지식과 FE 지식을 모두 쌓을 수 있을 것이다.
- 기대: 내가 합류한 팀은 클라우드 도메인을 다루는 곳이었다. 컴퓨팅 자원을 다루는 서비스를 만들게 된다면 FE 개발자로 일하면서 부족한 CS 지식도 쌓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현실: 이직할 때쯤엔 이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되긴 했다만, 입사 초반에는 도메인 지식까지 흡수하기에는 내가 너무 아는게 없었다. 연결고리가 있어야 지식을 쌓는데, 기반 지식이 부족해서 뭘 쌓을 수가 없었다. 서버도 잘 모르는데 로드밸런서니 쿠버네티스니 하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입사 후 한동안은 회의를 녹화했던 기억이 난다. 회의에서 나오는 용어 중 8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녹화한 회의를 돌려보며 검색한 후에야 겨우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반년 정도 이어졌던 것 같다.
착각 3. 으쌰으쌰하며 제품을 만들어가는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기대: 어려운 도메인을 쉽게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같이 머리를 맞대는 그런 그림을 기대했다. 개발 공부를 시작했던 계기인 모 스타트업에서의 인턴 시절, 보고 배웠던 풍경이 그러했기 때문에...
- 현실: 전 회사는 스타트업의 문화를 표방했으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대기업이었다. 트러플 향을 첨가한 감자칩 같은 느낌...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와는 별개로, 우리 제품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 나누는 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의사 결정을 내리는 대상과 실무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만들어야 할 것들은 매번 어디선가 정해져 내려왔고,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나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큰 기업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게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 뿐.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배울 게 많은 환경이었고 회사도 순항 중이었기에 만족하며 다녔다. 매 주 새로운 분들이 들어왔으며 모회사의 이름을 등에 업고 큰 투자를 받았다. 뚜렷한 매출이나 성과가 아직 나지 않았음에도 좋은 복지와 워라밸이 주어졌고, 입사하자마자 개발자 연봉 인상 붐을 타고 연봉이 올랐다. 그땐 그것들이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적다 보니 직장 생활을 참 이지 모드로 시작했구나 싶다.
1~2년: 적당한 단짠단짠
1년이 넘어가며 업무 체계가 갖춰지고, 동료들과 친해지고, 오너십을 가지는 제품이 생기면서 재미를 붙였다. 이것저것 스터디도 하고, 개선점들에 대해 목소리도 내보고, 오락 대장 역할도 하고 그랬다.
이때쯤 분명 미래의 성공을 담보로 현재의 풍족함을 가불받은 것일 텐데, 그렇다기엔 긴장감이 도통 없는 것이 좀 쎄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개발 기한은 자주 미뤄졌고 제품을 출시해도 피드백이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면 계열사들의 개밥 먹기가 대부분의 트래픽을 차지했기에 일반적인 대고객 서비스와 아예 온도감이 다를 수밖에 없긴 했다. 구글 애널리틱스를 처음 달고 통계를 봤을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것이 우리 팀이었으니 말 다했다.
절대적인 사용자가 적으니, 전 회사에서는 일반적인 B2B 회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 예를 들면 VOC 대응, 또는 요구사항을 맞추기 위한 빠듯한 개발 일정 등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대신 원한다면 문서화, 각종 PoC, 개발 경험 고도화 등의 프로젝트들을 자유롭게 해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샌드박스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클라우드 리소스가 널려 있었고, 문제가 생겼을 때 기술 조언을 구할 곳도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의미로 사치스러운 환경이었다.
회사는 개인의 행복을 적당히 챙길 수 있을 만큼 안락했고, 도메인은 성장을 위한 스트레스를 적당히 받을 만큼 어려웠다. 제품 얘기를 더 많이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긴 했지만, 팀 내 프로젝트를 통해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원온원때 후발 주자인 우리 회사의 강점이 뭔지 알고 싶다는 질문을 여러 번 했으나 납득할 만한 답은 얻지 못했고, 언젠가부터 그 질문은 하지 않게 되었다.
2년~: 헤어질 결심
만 2년이 지나던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이직을 생각했다. 그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1. 회사의 방향성에 대한 공감 결여
연차가 쌓이면서 어렵고 도전적이었던 것들이 점차 손에 익었다. 일상적인 업무들의 새로움이 바래자 해결되지 않은 채로 한편에 치워둔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만들었고 앞으로 만들 것들에 대한 궁금증들, 가령 이 서비스를 누가 어떻게 쓰고 있는지, 이후의 방향은 뭔지, 지금 이걸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물음들에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더 문제라고 느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러한 질문들을 점점 덜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모르는 게 있으면 답답했고,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는 것들에 의문을 품곤 했었다. 그런데 "나는 몰라도 되는 것" 들이 내 레이더망을 아득히 벗어날 정도로 쌓이다 보니, 나는 차라리 다른 곳에서 의미를 찾겠어 라는 정신승리 상태에 도달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예전만큼 궁금해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후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2. 도메인의 한계
입사 전 큰 기대 요인이었던 도메인이 아이러니하게도 큰 이직 사유 중 하나가 되었다. 입사하며 도메인에 기대했던 것은 2가지였다.
1. 클라우드 도메인에 익숙해지는 것
2. 복잡한 기술을 쉽게 (=사용성 좋게) 풀어내는 것
첫 번째 기대는 예상과 같았고, 두 번째 기대는 예상과 달랐다. 나는 클라우드 도메인에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복잡한 기술을 쉽게 풀어내진 못했다. 클라우드에는 죄가 없다. 내가 간과했던 것은 개발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들은 일반 유저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용성이 덜 중요하다는 점이다. 당장 눈을 감고 젠킨스나 kibana의 UI를 떠올려 보자. 음...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내가 만들던 서비스인 B2B 클라우드 콘솔 또한 개발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였고, 고객 관점에서 서비스의 도입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클라우드 자체의 안정성과 특정 기능의 지원 여부이지 사용성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숙련된 사용자일수록 cli나 sdk를 활용할 테니 콘솔의 사용성은 애초에 중요한 어필 포인트가 되기 힘들다. 콘솔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던 내가 이 사실을 깨닫는 건 꽤 뼈아픈 과정이었다.
이 2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 더 부합하는 회사로의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퇴사
연초부터 틈틈이 정리한 이력서를 가지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중, IT 업계에 겨울이 들이닥쳤다. 전 회사는 가능성이 아닌 구체적인 숫자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야 하는 단계에 돌입했다. 회사가 겨울을 맞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많았던 탓에 나도 동료들도 여러모로 감정 소모가 심했다.
좋은 상황에서 이직을 한다고 하면 덜 미안할 터인데, 좋지 않은 상황에서 휘청이는 팀을 두고 이직을 하자니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어려울 때 힘을 보태긴커녕 힘이 쏙 빠지는 소식을 들고 온 내가 얄미울 법도 하건만, 하나같이 마지막까지 좋은 말들과 함께 따뜻하게 보내주어서 더 미안했다.
지금은 팀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전해 들었다. 비록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퇴사했지만, 3년간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준 회사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 돌아보면 여러 실험적인 시도들에 관대했던 것, 모르는 것에 지레 겁먹지 않을 수 있는 맷집을 키워준 것 등 하나하나 감사한 것들이 많다. 회사도, 내가 좋아했던 우리 팀도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적응 중이라 후기를 남기기엔 좀 이르지만, 새 회사는 이전 회사와 모든 면에서 조목조목 반대인 곳이다. 환경을 싹 바꾸고 싶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상극일 줄이야.
일단 매일 재택하던 금수의 삶을 청산하고 매일 출근하고 있다. 사무실이랑 낯가리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출퇴근 인사를 뭐라고 해야 적당할까 -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고민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했다. 출퇴근에 맞춰진 생활 패턴이 게으른 본성을 멱살 잡고 캐리해주고 있어서 좋다. 제품에 관한 얘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던 것도 말끔히 해소되었다. 지금 다니는 곳은 제품에 관해 얘기를 정말 많이 한다. 사실 너무 많이 해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껄껄.
내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잘 굴러가던 회사에 있다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티가 나도 너무 나버리는 곳에 오니 스트레스가 없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또한 원하던 바다.
아무튼 나는 첫 직장을 다니며 이런 고민을 했고, 고민 끝에 이직했고, 지금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마주하는 중이다. 여기서도 여전히 수많은 고민과 질문들이 생기겠지만 지난 3년의 세월을 바탕으로 이번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며 좀 더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길.
잘 있거라 첫 회사야, 그리고 화이팅 하거라 나 자신아.
